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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공예 나전칠기의 세계적 부활을 꿈꾸죠”
15세에 시작한 칠기 공예… 60여년 옻 공예 명맥 잇기에 힘써
[인동초]-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 임충휴
2021-02-23 00: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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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구 공예전시관에서 만난 임충휴 칠기 명장. 2004년 대한민국 칠기 명장에 선정된 그는 나전칠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사진=황정아 기자] ⓒ스카이데일리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에요. 환경친화적이고 건강에도 좋은 우리 나전칠기가 다시 살아나 명맥을 잇고 세계에도 그 진가가 알려지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나전칠기는 세계적으로도 큰 호평을 받고 있어요. 우리나라처럼 칠기 제작 기술이 훌륭한 나라가 없기도 하고요. 이런 훌륭한 전통 기술을 정부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칠기에 관심을 갖고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옻 공예란 옻나무에서 채취한 도료인 옻을 칠해 여러 기물이나 장식을 아름답게 만드는 공예다. 우리에게는 칠기 공예, 특히 옻칠한 제품의 표면에 조개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모양을 만들어 붙인 나전칠기로 잘 알려졌다. 원주 등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옻은 예로부터 생산량이 적고 비싼 탓에 고가의 미술 공예품에만 쓰인다. 과거에는 귀히 여겨져 널리 인기 있는 품목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옻 공예품 제작이라는 외길을 고집스럽게 걸어온 이가 있다. 옻 공예와 칠기 제작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임충휴 칠기명장(72)을 스카이데일리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그의 작품전시관에서 만났다. 전시관에는 자개장과 칠기함 등 반짝반짝 빛나는 다양한 공예품이 가득했다.
IMF 여파에도 칠기 공예 포기하지 않아… 다시 일어서 명장 꿈꿔
임 명장은 15세에 처음 칠기 공예의 존재를 알았다고 했다. 고향인 완도를 떠나 무턱대로 서울로 올라왔던 어린 소년에게 누군가 기술을 배워보지 않겠냐며 공예장에서 일하게 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공예장에서 어릴 적 고향에서 가지고 놀던 전복 껍데기가 반짝이는 보물이 되는 것을 본 소년은 나전칠기를 배워보고 싶다고 결심했다.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어깨너머로 차차 기술을 배우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함께 일하던 선배 한 분이 그러시는 거예요. ‘너 옻칠 하는 것 배워봐라.’ 당시에는 현장에 자개를 전문으로 다루는 곳과 칠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자개를 다루는 것보다 칠을 다루는 게 더 힘드니까 옻칠 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개는 모양에 맞게 오려 붙이면 되지만 칠을 못 하면 칠기를 완성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칠을 전문으로 배우기로 했어요.”
칠기 공예에서 옻칠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다. 칠기의 마감 단계인 옻칠은 말려서 정제하는 방법과 말릴 때의 습도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정제된 도료를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옻은 성질이 까다로워서 옻칠을 하기 전 가구에 손자국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제대로 마르지 않는다. 손에 있는 유분이 옻이 제대로 마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팔면 안 되는 것이 칠 작업이다. 임 명장은 이를 배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따뜻한 물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시절, 그는 손이 쇠붙이에 달라붙는 추위에서도 옻칠에 쓰기 위해 맨손으로 물을 떠서 칠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공예장에서 칠기 제작법을 배운 그는 본격적으로 칠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70년대와 80년대는 그야말로 나전칠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임 명장의 칠기 사업도 호황을 누렸다.
“그땐 그렇게 호황일 수가 없었어요. 서울에 칠기 제작하는 사람들하고 칠기 판매하는 가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인사동이니 노량진이니 큰 거리마다 나전칠기 가게가 가득했는걸요. 그런데 그런 공방들이 97년 IMF가 터지자마자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 저와 같이 옻칠 공예에 종사하던 사람이 13명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전부 그만뒀죠.”
온 나라를 덮친 IMF의 여파를 임 명장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부도를 맞았고 100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이 함께 일하던 그의 칠기 공방은 문을 닫아야 했다. 빚도 많이 졌다.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겨우 그 빚을 갚았다. 모든 것을 잃은 임 명장은 고민 끝에 칠기 제작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3개월 동안 칠기 공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막상 그만두려니 할 게 없는 거예요. 나는 평생 칠기만 만들며 살아왔는데 뭘 해야 하나 싶었죠. 그때 주변에서 칠기 제작을 포기하려는 저를 말리면서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제도가 있으니 그것에라도 도전해보라고 조언해줬어요. 괜찮은 생각이다 싶었어요.”
결국 임 명장은 칠기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서 3명의 직원을 데리고 다시 공방을 차렸다. 자신의 기술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칠기 기술의 명장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여러 공모전에 작품도 냈다. 미끄러지기 일쑤였으나 수상하는 작품도 더러 있었다. 한번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기란 정말 어려웠지만 처음 칠기제작을 배울 때처럼 어렵지는 않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명장 된 뒤엔 후학 양성에 힘써…“바라는 것은 옻 공예의 활성화뿐”
▲ 임 명장이 십장생도가 표현된 자개장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불로장생의 상징 10가지를 뜻하는 십장생도는 임금 행차를 그린 행렬도와 함께 임 명장이 가장 좋아하는 도안이다. ⓒ스카이데일리
“명장이 되려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최소 25년의 경력이 필요했어요. 저야 오랫동안 해왔으니까 경력에는 문제가 없었지요. 그런데 명장이 되는 조건에 최소 하나 이상의 특허, 그러니까 자신의 고유한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느 직종이든 그렇겠지만 특히 칠기 제작 분야는 특허를 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 부분이 많이 어려웠지요. 고심 끝에 가뜩이나 손이 많이 가는 칠기를 하나하나 하기보다는 동시에 여러 개를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지요.”
2004년 그는 마침내 고대하던 대한민국 칠기 명장이 됐다. 임 명장은 명장이 된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술자로서 그의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는 점이다.
“명장이 되고 나니 제 기술을 알아주는 곳이 많이 생겼어요. 국가에서 기술자로서 저를 알아주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도 들었지만 제 스스로가 작품에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임하게 되더군요. 저보다 먼저 계셨던 명장님들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정말 열심히 했네요.”
“학생들의 진로 교육에 도움을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죠. 제가 말재주가 있는 편도 아니라서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런데 제가 배우던 때와는 달리 요즘은 기술이 천시 받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꼭 칠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적성에 맞는 기술을 배워서 연마하라고 조언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강의를 시작했어요.”
임 명장은 2014년부터 꾸준히 서울 남부교육원에서 30명가량 되는 학생들과 함께 나전칠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액 무료로 진행되는 그의 강의는 올해 수강신청자가 54명이나 됐다. 정원인 30명의 두 배 가까이 신청한 것이다. 나전칠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 그는 기쁘다고 말했다.
칠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가짐과 인내심이다. 임 명장은 아버지에게서 인내심을 배웠다.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한 후 1년 만에 고향집에 내려간 그에게 아버지가 종이 한 장에 붓으로 써준 인내라는 글자를 그는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
“옻칠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 닦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그만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인내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칠을 하기 전에 항상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마음을 다잡아요. 오롯이 칠에 집중하기 위해 방해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거지요.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작업에 임할 수 있어요.”
“옻칠은 신비의 칠이라고 하죠. 기온과 습도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했는데도 결과물이 다른 경우가 왕왕 생겨요. 옻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완성작이 나오기 전에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만큼 많은 정성과 세심함 그리고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칠기 공예의 중심은 올바른 마음가짐과 인내심 그리고 기술에 대한 애정
▲ 붉은 꽃이 표현된 자개장의 제작법을 설명하는 임 명장의 모습. 꽃 모양으로 오린 자개에 붉은 빛이 나는 옻칠을 해 아름다운 꽃장을 만들었다. ⓒ스카이데일리
인터뷰 중 임 명장의 전시관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전시관에는 세련된 나비 모양으로 오려 붙여 멋을 낸 나비장, 춘향전부터 흥부놀부전까지의 이야기를 자개로 표현한 민속장, 일전에 뉴욕의 액세서리 브랜드 ‘티파니앤코’에서 주문제작을 맡겼다는 자개함, 인천 송도의 한 호텔에 있다는 옻칠 나전 벽화, 청와대에 납품한 적 있다는 붉은 자개장까지 보물 같은 공예품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낯익은 듯 시선을 끄는 장이 있었다. 흐드러지게 꽃이 핀 꽃나무에 새가 날아드는 모습이 표현된 자개장이었다. 임 명장은 최근 종영한 tvN 사극 판타지 드라마 ‘철인왕후’에 그 자개장을 지원해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철인왕후’ 외에도 ‘황후의 품격’ 등의 드라마에 무료로 작품을 지원했다. 빌려준 작품들이 더러 훼손되거나 옻 마감이 부서지기도 했지만 그리 개의치 않았다. 나전칠기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어 방송국의 작품 지원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그는 심경을 밝혔다.
“나전칠기에 대해서 알고 또 관심 갖는 분들이 정말 적어요. 아름다운 우리 전통공예인데도 이게 뭔지 모르는 분도 많아요. ‘철인왕후’ 드라마 제작진과 연락할 때도 제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품 지원을 했던 건 드라마를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칠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서였어요. 고생스럽게 만든 작품들이 훼손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후세에 나전칠기가 이어질 수만 있다면 충분히 치를 만한 희생이라고 생각해요.”
임 명장은 전국에 있는 나전칠기 공방이 100개도 되지 않는다며 사라져가는 칠기공예의 명맥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칠기 제작업을 살리고 그 뿌리를 잇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600명이나 됐던 이전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15명의 조합원을 이끌고 조합장으로써 칠기 공예를 되살리고자 노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저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르잖아요. 많이 배웠고 또 그러니까 칠기를 세계적으로 알리기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젊은 사람들이 나전칠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세계화를 위해 힘써준다면 분명 칠기 공예의 제3의 전성기가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60년이 넘도록 쉼없이 나전칠기 제작에 평생을 바쳤지만 아직도 그는 작품을 만든 후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다 만든 후에는 항상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일흔이 넘는 연세에 손이 많이 가는 칠기 작업이 고될 텐데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칠기 제작을 멈추지 않겠다는 임 명장에게는 꿈이 있다.
“정말 어디를 봐도 전혀 아쉽지 않은 그런 옻칠 벽화를 만들고 싶어요. 언젠가 제 칠기 작품들을 전시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박물관을 만들어 그곳에 걸어둘 생각이에요.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완벽한 작품을 남기는 것이 제 꿈이자 목표예요.”
[박정은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